Page 115 - 고경 - 2020년 5월호 Vol.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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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대승기신론』에서 진여가 인연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것은 혼란
을 야기할 뿐이 된다.
이러한 구양경무의 입장은 『대승기신론』이 종자설을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구양경무가 보기에, 진여는 고요하고 활동성이
없으며 현상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것이므로 결코 훈습의 대상이 될 수 없
다. 진여는 고요한 것이므로, 깨끗하고 더러운 종자들 없이 진여가 더러
운 현상들을 훈습하여 현상 세계가 나타난다고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옷에 더러움과 깨끗함이 동시에 훈습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진여를 훈습하여 더러운 현상이 나
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러운 현상이 깨끗한 진여에서 나온다는 모
순”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구양경무는 『대승기신론』의 관점대로라면 깨끗
한 진여와 더러운 현상이 상호 융합된다고 보는 것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는 더러운 현상을 없애고 새롭게 변화할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기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더러운 현실 세계를 보면 볼수록 ‘완전하고
깨끗한 절대적인 진여’라는 분명한 목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태허는 『대승기신론』이 제창한 진여연기론의 합리성을 강
조하였다. 그는 『대승기신론』을 공종 이전의 작품이라고 봄으로써, 그것
과 특성이 일치하는 중국불교가 유식 불교보다 근본적인 교법임을 주장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진여가 현실 세계에 제대로 투영되지 못하기 때
문에 현실 세계의 더러운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태허
의 관심사는 진여 그 자체가 절대 부동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지
생동감을 가지고 현실에 투영될 수 있는 논리(‘인연에 따라 움직이는 진여’)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진여가 활동성을 가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
다. 그래서 태허는 연기緣起의 주체를 더러운 망식妄識의 성격을 갖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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