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4 - 고경 - 2020년 5월호 Vol.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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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은로銀爐를 은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문종이 해린에게 하

           사한 금은 기명은 다구茶具일 것이라 추정된다. 차와 다구는 승려의 일상
           용품으로, 12세기 차 문화를 주도했던 그룹이 승려였으며, 차 문화를 향

           유했던 장소 또한 승원이었다는 점에서다. 무엇보다 승려의 일상에서 다
           사茶事는 수행자의 일상사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한편 왕과 차와 관련된 현화사의 기록은 의종 13년(1159)에도 왕이 현
           화사에 행차하자, 승려들이 다회茶會는 열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와 관련하여 『고려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3월 을해에 왕이 현화사로 행차했다. 동서 양원의 스님들이
                각각 다정을 설치하여 왕을 모셨는데, 사치하고 화려하게 하

                려고 서로 다투었다[三月乙亥, 行玄化寺. 東西兩院僧各設茶亭迎駕, 競
                尙華侈].”



             윗글은 의종의 어가를 맞은 현화사 양원兩院에서 다회를 준비한 정

           황이 드러난다. 그런데 승원에서 왕을 위한 다정을 설치했다는 것인데,
           다정은 차를 마시는 공간이다. 의종을 위해 명전茗戰을 베푼 것으로 짐

           작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주 이씨는 왕의 권세를 능가했던 문
           벌 거족이었다. 그러므로 인주 이씨가 후원한 사찰, 현화사에서 베푼

           명전은 최상의 차와 기물 등이 진설되었을 것이니 화려하고 사치한 명
           전의 규모는 극에 달했을 터이다. 그러니 현화사에서 벌어진 명전을

           “사치하고 화려하게 하려고 서로 다투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 고려에서 생산한 작설이나 뇌원차는 최고급 차로, 백차白茶를

           선호했던 시기이므로 단차團茶가 주류를 이뤘다. 12세기 청자 다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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