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고경 - 2020년 5월호 Vol.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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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법상종과 왕실

           의 밀착 관계를 조금 더 살펴보면, 법상종은 인주 이씨가 교단을 장악했
           고, 왕실의 후원을 받던 화엄종은 교세를 확장해 법상종과 양립하며 불교

           계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의종이 현화사를 방문, 양
           원의 스님들에게 환대를 받은 것은 법상종 승려들이 화엄종의 교세 확산

           을 막기 위한 환대가 아니었을까.
             의종이 다시 현화사를 찾은 것은 1167년이다. 당시 귀법사와 현화사

           를 찾아 다원을 방문했는데, “왕이 말을 달려 달령의 다원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왕을 따르던 신하들이 따라잡지 못하였다[馳馬到獺嶺茶園, 從臣者皆莫

           及].”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승원에서 벌어진
           명전茗戰은 승원에서 즐기는 단순한 풍류라기보다 왕과 승단의 유대 관계

           를 강화한 수단일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해진다. 종파의 성쇠가 왕의 친밀
           도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면, 차가 승단과 문벌 귀족·왕실을 이어주는 징

           검다리로써 그 활용 가치는 충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송나라와 내왕이 잦았던 수행승들은 새로운 차 이론을 섭렵했던

           그룹이다(사진 1). 그러므로 그들은 차 전반에 해박한 정보를 가진 전문가
           로, 고려의 차 문화를 이끌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 명전놀이가 승원에서

           주도된 배경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구나 승원의 풍부한 경제력,
           불교계의 사회적인 영향력은 고려의 차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게 한 동력이

           고, 명전茗戰 놀이는 관료 문인들을 초청하여 벌린 일종의 품다회品茶會 같
           은 것이고 문회文會의 성격을 띤 문화행사였다. 물론 이 행사에서 참석한

           스님이나 문인들은 시와 그림으로 문회의 격조를 나타냈을 것인데, 이는
           송대 투다鬪茶와 관련한 그림 및 다시茶詩가 많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를 통해 승단에서는 우호적인 왕실 귀족이나 관료 문인들과의 다층적 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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