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고경 - 2020년 9월호 Vol.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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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다. 정상적인 시각 기능을 가진 두 사람은
같은 세상을 보고 있을까? 내가 보는 사과의 빨간색은 내 옆에 있는 사람
이 보는 사과와 같은 색인가? 두 사람이 보는 색이 같은지를 알아낼 방법
이란 없다. 왜 그런가?
내가 보는 그대로 객관세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과가 빨갛게
나에게 나타나는 것은 사과가 빨갛기 때문이 아니다. 그 빨간 색은 나의
시각중추가 그려낸 세계다. 빨간 사과라는 객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객관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이고 내
가 그린 세계일 뿐이다. 끝없는 연기의 그물망에 의해 만들어진 모습일
뿐이다.
무아와 연기
우주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아주 극히 일부분을 보면서 우리
는 그걸 우주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서로 다른 시각의 영상이 중첩돼 나타
나는 환영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우주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내 눈앞에 나타난 모습 그대로의 우주는 어디에도 없다. 나에게 나타나는
것은 우주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려낸 우주일 뿐이다.
이는 내 주위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빨간색으로 보이는 사과는 빨
갛지 않다. 나에게 푸른색으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지 않다. 빨간 사과는
빨간 게 아니고, 푸른 하늘은 푸른 게 아니다. 빨간 사과도 없고 푸른 하
늘도 없다. 다만, 나에게 빨갛게 나타나고 푸르게 나타날 뿐이다. 단지 그
것뿐 다른 무엇이 없다. 오직 연기일 뿐이다. 그래서 무아다.
부처님은 연기에 의해 나타날 뿐인 상想을 신기루와 같다고 하셨고,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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