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고경 - 2020년 9월호 Vol.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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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우주의 시공간적 구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우주의 연기적 구조에 의해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도록 설정돼 있다.
그럼 우주의 시공간적인 구조가 아니라면 우리는 세계를 정확하게 볼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
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보는 빛이란 전자기파의 극히 일부 영역이다.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전자기파 중에서 4천에서 7천 옹스트롬 사이의 파장을 가진 빛
이다. 이는 빨강에서 보라에 해당하는 빛이며, 가시광선이라고 한다. 가시
광선보다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로는 자외선, X선, 감마선 등이 있고, 가시
광선보다 파장이 긴 것으로는 적외선, TV파, AM-FM 라디오파, 이동통
신파, 장파 등이 있다.
가시광선 이외의 전자기파들도 눈으로 들어와서 (적어도 그 일부는) 그 자
극이 시신경을 타고 뇌로 흘러 들어가겠지만, 두뇌의 시각중추는 이들에
게 반응하지 않는다. 자극이 들어와도 그냥 흘려보낸다. 대상 세계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각중추가 반응하게 돼 있는 세계’ 간단히 말하면 ‘우
리가 볼 수 있는 세계’만을 본다. 생존에 도움이 되는 장치를 습득하고 불
필요한 장치를 제거하는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시각은 빨강에서 보
라까지의 가시광선만을 감지할 수 있는 상태에 현재 와 있다.
진화의 과정은 지금도 진행되므로, 우리가 보는 세계와 천만 년 전의 우
리 조상이나 천만 년 후의 우리 후손이 보는 세계는 서로 다를 것이다. 식
탁에 놓인 빨간 사과를 다른 색으로 볼지 모른다. 감각 기관을 통해 대상
을 접촉하고 이 접촉으로 발생한 자극을 신경계가 시각중추에 전달하고
이 자극을 시각중추가 그려낸 것이 빨간 사과인데, 감각 기관과 신경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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