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9 - 고경 - 2020년 9월호 Vol.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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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오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백암정부는 천왕도오의 법통설이 명백한 오류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그런즉 문인門人의 비문과 규봉의 글과 권덕려의 비명은 또 무엇에 근
거하여 그렇게들 주장을 했던 것인가. 단지 짐작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고
말장난하는 자들이 궤심궤심으로 날조해낸 것들이니 또 어찌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2, 교몽당이 『오가종파』에 대하여 거듭 교정을 가하면서 붙인 서문의 내
용에 대하여 ‘장무진 거사는 동산과 덕산의 가르침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혹시 천황에 대한 착오, 내지 후에 달관담영에 대한 당부재唐符載가 찬술
한 「천황도오증기天皇道悟增記」와 구현소가 지은 「천왕도오증기天王道悟增
記」 등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말한 것은 모두
새빨간 거짓이다.
3, 달관담영과 무진 거사가 생존했던 연대를 비교해보면 무진 거사가 담
영에 대하여 당부재의 비문을 얻고 또 구현소의 비명을 얻었다는 내용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다. 또한 무진 거사가 관심을 선종에 두었던 만년의 기
록을 보면 철종 원우 6년(1091) 때 강서의 배에서 도솔종열(兜率從悅, 1044-
1091)을 친견하고 탁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무진 거사가 의심이 깊어졌을
때 야반에 그릇에 부딪치는 순간 깨침을 터득하였다. 그때 무진 거사의 나
이가 50이었다. 그것은 원우 6년 신미년(1091) 세상을 떠나던 해로부터 역
산하여 가우 4년(1059)까지는 33년인데 그 때서야 비로소 선종에 뜻을 두고
깨침을 터득한 것이다. 어찌 문열 선사를 친견하기 전 아직 어린애였을 때
동산과 덕산의 선법 및 교화행위를 논할 수 있었겠는가.
다시 백암정부는 객관적인 사실을 들어 천왕도오의 법통설이 날조임을
증거를 들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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