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4 - 고경 - 2020년 9월호 Vol. 89
P. 124
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 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 「아지랑이」
그렇다! 살아있는 한, 열반으로서 죽음에 들지 않는 한 수행자는 언제나
‘나아갈 길도 없고 물러날 길도 없는’ 백척간두 끝에 놓여져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이기에 어쩔 수 없는 절망감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또한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라는
결구처럼 모든 것이 아지랑이, 즉 꿈이고 헛될 뿐이라는 공空에 대한 인식
도 드러나 보인다. 구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무산은 이러한 회오와 번민의
늪을 빠져 나와 드디어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다. 다음은 오도송이다.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언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산과 들만이 아니라 밤하늘도 먼 바다 울음소리도 모두 하나가 되어 시
적 화자와 함께 한다. “천경 그 만론이” 바람에 이는 파도일 뿐이라는 것이
다. 책 속의 그 많은 논지들도 그것을 읽으면서 화자의 머리를 오가는 생
각의 줄기들까지 그저 모두 바람 따라 일어나는 파도일 뿐, 그 아래 본래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