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9 - 고경 - 2020년 9월호 Vol. 89
P. 129
주 만물이 저마다 제 빛으로 빛나는 동시에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
는 모습이야 말로 곧 화엄의 세계임을 무산은 보여 준다. 이 숨어 있는 뜻
을 알면 『화엄경』을 정말로 다 읽은 것이요, 번뇌의 불을 끈 적멸의 경지를
얻은 것임을 무산은 설파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대립적 경계선이 지워진
곳에 무산의 선시의 묘미가 있다.
그런데 생명 앞에서, 삶 앞에서 모든 존재의 높낮이가 없다는 만유 평
등사상을 제시했던 무산은 수행자의 위선과 자만을 경계한 임종게를 남기
고 원적에 들었다.
천방지축天房地軸. 기고만장氣古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 「임종게」
종교인의 위선과 자만을 경계한 일갈이다. 일생을 통해 선禪을 추구했
으면서도 목표하는 바에 이르지 못했음을 고백한 내용이다. 속인들은 스
님의 수행을 추앙하지만, 수행자 자신은 늘 수행정진이 부족하다고 느낀
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았다고 형상화
하고 있다.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았다면 본능에 지배당하는 짐
승의 모습이다. 무산 스님은 일생을 통해 수행정진 했건만 깨달음의 경지
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연 무산 스님다운 진
솔하고도 하심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