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3 - 고경 - 2020년 10월호 Vol.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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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에 선승으로 대덕사에서 참선하여 득도한 후 당대 최고 문화예술전문

            가에게서 꽃꽂이와 미술품 감정을 배운다. 이들의 소개로 최고권력자에게
            차를 가르치는 효시가 되었다.

              여기서 살짝 언급하고 지나가자면 꽃꽂이와 다도 등은 일본에서는 주로
            상류계급의 귀족과 무사들이 즐기던 남성 문화였다. 메이지(明治, 1868) 이

            후 근대에 와서야 여성들이 신부 수업 등의 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여 현
            재와 같이 여성화 대중화되었다. 쇼군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를 계기로

            오닌應仁 원년부터 교토에서 일어난 오닌의 난(1467-1477)을 맞아 고향인 나
            라로 잠시 귀향한 후 다시 교토로 돌아와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매우 간략하게 슈코의 경력을 소개했지만, 실은 그에 대한 기록에는 정확
            한 근거가 없는 것도 많아서 현재 시점에서는 전승의 영역에 두고 있다. 한편

            이와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슈코(1423-1502)가 조선의 김시습(金時習, 1435-

            1493)과 교류를 가졌다는 주장이 있는데, 설득력 있는 사료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한일 다도 교류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교토 대덕사에서 임제선 계승     슈코는 임제종 사찰인 대덕사大徳寺의

            잇큐소준(一休宗純, 1394-1481)에게 참선하여 득도하였다고 한다. 이때, 스
            승 잇큐로부터 중국 송대宋代 선림禅林의 거장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
            1135)의 묵적墨跡을 하사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사진 1).

              원오극근의 묵적을 ‘원오묵적’이라고 통칭하는데, 슈코는 이 원오묵적을

            생애 가장 귀한 보물로 소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임종을 맞게 되자 제자
            에게 ‘내 기일에는 원오묵적을 걸고 소박한 차 단지에 담긴 차로 제사를 지
            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라고 한다.

              슈코는 왜, 이토록 이 원오극근의 묵적에 마음을 두었을까. 하나는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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