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0 - 고경 - 2020년 12월호 Vol.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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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멀리 덕유산德裕山이 보이고, 남쪽으로 남악南嶽인 지리산智異山이 아스
           라이 보인다.
             홍류동으로 들어오면 무엇보다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 857-?)선생의 발

           자취들이 남아 있다. 최치원은 868년 경문왕景文王 8년에 12살 나이로 당

           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에 외국인 특별전형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여
           중국 천하에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신라가 기울어져 가는 885
           년 헌강왕憲康王 11년에 귀국하였다. 삼국을 통일하여 통일왕국의 꽃을 피

           운 때가 언제더냐 싶듯이 내부사회의 모순으로 쓰러져 가는 통일신라의 고

           국 땅에 돌아온 최치원은 대산군(大山郡, 현泰仁) 태수와 부성군(富城郡, 현瑞
           山) 태수 등 지방관으로 백성들을 돌보다가 무너지는 나라를 바로잡고자
           국가개혁론인 시무책을 894년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올렸다. 왕이 이를 받

           아들이고 육두품으로는 최고 지위인 아찬阿湌에 그를 임명하여 국가 일을

           시키려고 하였으나, 서울 세력들의 질시와 견제로 인하여 898년에 면직되
           자 결국 나라를 바로 세워보려는 뜻을 접고 전국으로 주유하면서 글도 짓
           고 지식을 전파하기도 했다.

             당시 최치원은 화엄종 고승으로 유명한 친형 현준賢俊 화상이 머물고 있

           는 해인사에 들어와 화엄승들과 교유하며 불교와 관련한 글을 짓기도 했
           다. 유불도 삼교에 통달한 그이기에 그의 많은 문장에는 유불도의 개념들
           이 종횡무진으로 구사되고 있었다. 그의  거처로 전하는 자리에 현재 고운

           암孤雲庵이 있다. 이 시절 독서를 하며 지내는 중에 「해인사海印寺 선안주원

           벽기善安住院壁記」를 쓴 것으로 전한다. 이 무렵 민란으로 세상은 매우 어
           수선하였고, 궁예(弓裔, ?-918)와 견훤(甄萱, 867-936)은 이미 무리들을 모아
           따로 나라를 세우려고 하고 있었다. 홍류동을 걸으며 뛰어난 지식인이 자

           기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든 사연들을 생각하니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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