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2 - 고경 - 2020년 12월호 Vol.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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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에도 계셨는데, 지금 가 봐라 거기 계시는가! 그런데 성철 대종사는 이
렇게 말씀하셨다. “팔만대장경은 다 지월지지指月之指, 즉 달을 가리키는 손
가락일 뿐이다. 누구든지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쳐다보지 말라. 불법은 실
제 근본 마음을 전하는데 생명이 있는 것이다. 말은 마음을 전하는 방편
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이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미 70년대 상당법문
으로 『임제록臨濟錄』에 대해 평석을 하실 때 한 말씀이다. 그래도 초급 중생
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손가락인지 가래떡인지부터 알고 싶은 것을 멈
출 수 없다. 아래로 축 쳐지는 가래떡이 달을 가리킬 수는 없으니까. 많은
불교학자들이 양성되고, 그 많은 사찰의 불교대학에서 공부부터 열심히 하
는 모습을 더 간절히 기대해본다. 비록 나는 성철 스님이 번역하신 『돈황
본敦煌本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멋으로 들고 다니다가 다 읽지도 못하고 잃어
버린 사람이기는 하지만.
백련암 고심원古心院에서 외우畏友 김호석金鎬䄷 화백이 그린 성철 대종
사의 진영眞影과 3만 명을 넘는 추모객들이 골짜기를 가득 채운 다비식 전
모를 그린 대형 그림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 사람을 그리는 일은
형상을 그리는 사형寫形이 아니라 그 인물의 정신을 포함한 전체를 그리는
사신寫神이라는 뜻을 여기서 알 수 있었다. 참으로 다시 그리기 어려운 절
품絶品이다(사진 7).
원택 대화상은 성철 스님을 평생 시봉하셨다. 속가의 인연으로 말하면,
나의 고등학교 대 선배님이시다. 이론과 지식을 좋아하는 나를 만나실 때
마다 늘 미소만 지으시고 말씀을 많이 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번잡한 내
말을 들으시기를 좋아하신다. 속은 어떠신지 몰라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
신다. 어느 해 추운 겨울 백련암으로 찾아뵈었을 때에도 쾌히 방 하나를
내어 주시며 자고 가라고 하셨다. 60년대 말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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