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6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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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종승도 종지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물론 조선불교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불교가 탄압과 소외받기 시작했던 조선건국 이후부터 정확히 해방 이후
까지도 우리는 우리 불교 역사와 그 문화에 대해 문외한이었고 관심도 없
었다. 유구한 불교 의식儀式과 신앙이 미신迷信으로까지 취급당하고, 경전
은 절 뒷간에서 찢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최남선은 “한국의 역사는 정치법
제, 교학문예라는 어떤 방면으로든지 불교와 불교도의 관련을 제외하고는
해석하고 밝게 판단할 수 없다.”고 했고, 이능화 역시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이 땅에 불연佛緣이 깊고 해인사의 대장경 또한 세계의 법보法
寶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나라 고승의 전기를 수집한 박봉석(朴奉石, 1885-
1910)이나 10여 년 동안 불교 사료를 찾아 팔도의 산천을 헤맨 권상로(權相
老, 1879-1965) 같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지성知性들 역시 한국불교의 역사
와 문화가 지닌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불교사 복원에 일생을 바
쳤던 것이다.
연재는 조선시대에 편찬되고 찬술된 역사서와 사대부의 문집, 스님들이
찬술한 사적기寺蹟記 속의 불교사 등을 소개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불교를 탄압하고 소외시킨 기록들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왕과 신료들의 불
교인식에 대한 민낯을 볼 수 있고, 사대부들은 팔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풍류와 함께 사찰의 역사를 기록하고 덕 높은 스님들의 비문을 그들의 문
집에 옮기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기간 동안 유구한 불교 역사가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불교 기록을 뽑아 『대동선
교고大東禪敎攷』를 찬술하기도 하였다.
“불교가 중국에서부터 해동海東에 이른지가 1천 7백여 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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