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9 - 고경 - 2021년 1월호 Vol.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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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라고 하듯이 중국에서의 통치이념은 단순히 통치술만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 다분히 ‘성인’과 ‘도’의 범주에 속하는 사상이었다. 그에 따라 전
            국시대에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였으며,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秦은

            바로 법가法家의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가혹한 법

            치는 곧 진을 망하게 하였고, 그 뒤를 이은 서한西漢에서는 도가道家의 황
            로학黃老學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이러한 황로학에 따른 통치는 상당
            히 성공적이어서 이른바 ‘문경의 치[文景之治]’라는 문제와 경제의 태평시대

            가 40년 동안 이어지고, 그에 따라 도가 사상이 민중들에게 광범위하게 삼

            투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황로학은 한계를 노정하여 무제武帝에 이르러서는 유학儒學을 통
            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학은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의하여

            사라진 유가 경전을 복원하면서 경학經學이 주류를 이루었고, 경학은 주

            석注釋에 매몰되면서 역시 통치이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여 서한
            은 멸망하게 되었다. 서한을 이은 동한에서는 비록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 기능을 이미 상실했고, 민중들은 ‘문경의 치’

            를 떠올리며 새롭게 도가 사상을 유행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한의 황실에서는 이미 서역인들로부터 전래되어 있
            던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불교가 통치이념에 적합함을 아주 빠
            르게 파악했다. 그러나 뿌리 깊은 ‘이하론’에 의한 저항을 의식하여 황실에

            서는 불교와 사상적으로 유사한 ‘도가’와 융합시켜 이질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초왕楚王은 황
            로黃老의 미언微言을 읽고, 다시 부도浮屠를 숭상하여 사당에 모셔 신神과




            1) 『周易』, 「風地觀卦」 “聖人以神道設敎, 而天下服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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