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2 - 고경 - 2021년 2월호 Vol.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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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무자성의 연기     우리는 감각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감각은 생존을 위한 것일 뿐,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예를 들어보
           자. 바닷물에는 소금이 들어있어서 짜다. 그런데 바닷물이 짜냐고 고등어

           에게 물어본다면 (아직 물어보지 못했지만) 짜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달

           리, 고양이는 단맛을 느끼지 못한다. 단맛은 나무 열매를 먹는 동물에게
           필요한 감각이다. 고기를 먹는 고양이는 단맛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으므
           로, 단맛을 감지하는 수용체를 만들지 않게 진화했다고 한다.

             그러면 바닷물은 짠가? 아니다. 설탕물은 단가? 그것도 아니다. 어느 것

           도 짜거나 단 것이 아니고, 짜지 않거나 달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물
           에 소금과 설탕이 들어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소금이 짠맛을 주고, 설탕이
           단맛을 준다. 그러나 고등어가 짜다고 하지 않는 소금에 짜다는 실체가 있

           을 수 없고, 고양이가 달다고 하지 않는 설탕에 달다는 실체가 있을 수 없

           다. 짜거나 단 결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신의 본질essence, 즉 자성自性을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성이 없어서 무자성無自性이고, 실체가 없어
           서 무아無我다.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는 대상이 나에게는 짜거나 달게 느껴진다. 그렇게

           나타나도록 형성된 연기의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소금과 설탕만이 아니
           다. 일체의 객관세계가 모두 무자성이고 무아無我다. 객관세계를 나에게 드
           러내는 연기緣起가 있을 뿐이다. 내가 보는 세계, 내가 사는 세계는 “세계 자

           체”가 아니라 무아無我의 연기緣起에 의해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다.



           다함이 없는 세계와 공의 연기     연기緣起는 무아와 무자성의 연기다.
           일체의 모든 것이 무아고 무자성이어서 어떤 인연이 맺어지느냐에 따라 다

           함이 없는 무진 세계가 나타난다. 고등어에게는 바닷물이 짜지 않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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