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7 - 고경 - 2021년 2월호 Vol.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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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은 조선이 사찰을
지리지에 수록한 실제적인 이
유를 보여주고 있다. 『세종실
록』은 “승려들이 사방으로 흩
어져 절을 비워두고 거처하는
자가 없고, 지속적으로 수리
하거나 중창하지 않아 점점
사진 2.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 1, 2쪽.
무너지고 허물어지기 때문에
승려들이 살만한 곳 36개소만을 마련하여 인원을 정하고 사는 규칙을 작
성한다.”는 것이다. 스님을 환속시키고 절에 소속된 노비와 토지를 국가로
환수시킨데 이어 선종과 교종으로 종파를 축소시키고 절을 축소시켜 수행
하는 인원을 정하고 토지를 나누어 주어 관리한다는 것이다. 불교를 숭상
하거나 신앙을 위한 것이 아닌 관리와 통제를 위해서였다.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東國文士의
시문을 첨가하여 1481년(성종 12) 50권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편찬되었다.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는 1485년 김종직(金宗直, 1431-
1492), 노사신(盧思愼, 1427-1498),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성임(成任, 1421-1484), 양성지(梁誠之, 1415-1482) 등에 의해 이루
어졌다. 이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풍속·인물 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
고 『대명일통지』의 예에 따라 고적 편목이 신설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
는 없는 성씨·봉수烽燧의 양조도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에 임사홍任士
洪·성현成俔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하였으나 내용상의 큰 변동
은 없었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 23)에 착수하
였다. 마침내 1531년(중종 26)에는 이행(李荇, 1478-1534), 윤은보(尹殷輔, 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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