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8 - 고경 - 2021년 2월호 Vol.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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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  신공제(申公濟,  1469-1536),  홍언필(洪彦弼,  1476-1549),  이사균(李思鈞,
          1471-1536) 등이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 25책으로 완성, 이에 ‘신증新增’의
          두자를 삽입하여 간행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에 현존하던 사찰이 불우佛宇 항목에 1,656

          개를 기록하였고, 폐지된 사찰은 고적古蹟 항목에 싣고 있다. 사찰 수가 이
          전에 편찬된 지리지에 비해 매우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동문선東文
          選』에 수록된 시문이 지리지에 포함되면서 사찰의 경우도 기복, 유람, 기문

          작성 등 사찰을 방문하면서 남긴 인물들의 시문詩文이 함께 기록되면서 많

          은 사찰들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서문에서 지리지

          에 사찰을 기록한 이유로 “사찰은 역대로 거기에서 복을 빌었다[寺刹歷代以
          之祝釐].”고 밝히고 있다. 또 김종직의 발문跋文에는 “산천, 성곽, 누대, 사

          묘, 사찰은 계리(計吏, 회계를 관리하는 아전)와 저주(邸主,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
          서 지방 관아官衙의 사무를 연락하고 대행하는 아전이나 백성)에게 물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사찰이 대대손손 조선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가리지 않고 가

          슴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절이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사정을 알 수 없기에 현지 사람을 통해 그 수를 파악
          했던 것이다.



              해인사海印寺 가야산 서쪽에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이 창건

              하였다. 수행이 높은 승려 순응順應·이정利貞·희랑希朗의 화상
              이 있다. 고려 때 판각한 『대장경』과 역대의 『실록』을 모두 이 절
              에다가 간직하였다. 고기古記에, “가야산은 형승이 천하에 뛰어

              났고, 땅 기운이 해동에는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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