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고경 - 2021년 3월호 Vol.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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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해 『향상문답香象問答』이라고도 불리는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으로 엮
인 것을 보면 당시 공부하는 방법이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이처럼 묻고 답하면서 지식이 전해지는 것은 당시 보편적 공부법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전하는 강사는 한 명이고, 듣는 학생은 수백이니 넓은 공
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어야 함은 분명하다. 당시 면학분위기야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지금처럼 확성기도 없는 사정에서야 건물을 어떻게 사용하
는 것이 효과적이었을까? 공간을 넓게 사용하는 것보다 무량수전처럼 좁
게 사용하는 것이 강사의 목이 좀 덜 아팠을 것이다.
사라진 금당
겸재정선(1676-1759)이 57세에 그린 『교남명승첩』에 실린 7번째 그림이 ‘순
흥 부석사’인데 이 그림을 보면 안양루를 사이에 두고 위에 무량수전과 아
래에 법당이 있었다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사진 6).
이외에도 안정구(1803-1863)가 1849년에 쓴 『재향지梓鄕志(부제 순흥읍지)』
에 실린 ‘불우佛宇’항목에 부석사
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안양문
앞에 법당이 있고, 그 좌우에 선
당과 승당이 있으며 다시 그 앞에
는 종각이 있다고 분명하게 기록
되어 있어 『교남명승첩』에 실린 부
석사 그림과 일치한다(사진 7).
사진 6. 『교남명승첩』 중 부석사도. 지금은 옆으로 선 범종각만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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