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3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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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전을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바꾸어 개축하였다. 적멸보궁 오른쪽 뒤에 응
진전이 있다.
적멸보궁 옆에 있는 요사체에는 ‘죽로지실竹露之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
고, 기둥에는 세로로 된 ‘방장산方丈山’이라는 현판과 ‘다솔사多率寺’라는 현
판이 걸려 있는데, 오래전에 왔을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걸려 있어 반가
운 마음이 들었다(사진 4). 1934년 다솔사에 광명학원을 설립하고 농촌계
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활발히 하던 당시에는 이곳이 경남 지역 항일운동
의 본거지가 되다시피 하여 사상적으로도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기
도 했는데, 공산주의자인 하필원(河弼源, 1900-?), 박락종朴洛鍾, 정희영(鄭
禧泳, 1902-?) 등이 ‘고려공산당 선언’을 한 장소도 이곳 ‘죽로지실’이라고 전
한다. 이 건물은 193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안심료安心寮와 붙어 있는데,
이 안심료에서는 역사적인 일들이 많이 있었다(사진 5). 항일독립운동을 한
시승詩僧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은 다솔사에 근거지를 두
고 서울의 망월사望月寺 등을 오가며 불교혁신운동과 독립운동 등을 할 때
에도 안심료에 자주 머물렀다. 만해선생과 다솔사의 인연은 깊다. 이런 역
사에는 다솔사 주지를 맡은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崔英煥, 1904-1979) 선생
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평생 만해 선생으로부터 감화를 받고 활동했다.
만해 선생은 그 삶 전체가 역사라서 많은 부분 우리가 알고 있다. 1909
년 만해 선생은 일본 불교계와 새로운 문명을 둘러보기도 했는데,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자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서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
편화와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여
친일불교세력과 대항하면서 실천적 활동에 나섰다. 1919년 그는 독립선언
서의 초안을 다솔사에서 집필하고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선생 등과 논
의 끝에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서와 본인이 쓴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채택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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