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4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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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독립선언사건으로 3년 징역형을 살고 나온 후에도 다방면으로 독립운
          동을 전개하고 승려의 결혼자유도 조선불교혁신의 하나로 맹렬히 전개하
          고, 스스로 결혼도 하였다. 이런 승려의 결혼자유운동은 불교계에 파장을

          주어 적지 않은 승려들이 결혼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승려의 결혼

          은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지금 조계종은 불교정화운동을 거치면서 승려에
          게는 혼인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되었지만, 일제식민지 시기에는 그렇지
          않은 분위기였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당시에 종교개혁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교회의 부패 이외에 성

          직자의 혼인자유였다. 결국 기독교는 혼인을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과 혼인
          을 인정하는 개신교로 분리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아무튼 만해 선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효당 선생은 12세 나이에 다

          솔사에 입문하고 1919년 15세의 나이로 친일승려인 이회광(李晦光, 1862-

          1933)이 주지로 있는 해인사에서 피 끓는 동지들과 함께 기미독립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인 박

          열(朴烈,  1902-1974)과  함께  ‘불령선인사不逞鮮人社’를  결성하고  흑도회黑濤
          會에 가입하여 동지들과 함께 암살, 폭탄 투척 등 행동주의적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불교공부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입정立正 중학교를 마
          치고 대정大正 대학에 다니던 시절인 1928년에 다솔사 주지로 피선되었고,

          동경에서 조선불교청년총동맹 동경동맹을 결성하고 범산凡山 김법린(金法
          麟, 1899-1964), 강유문姜裕文, 허영호許永鎬 등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결

          성하였다. 그는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불교학, 역사, 철학, 불교예술 등을
          광범하게 공부하고 1933년에 귀국하였다. 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을 맡아 친일불교세력에 대항하며 불교혁신운동을 전개하고, 서울에 명성

          여학교(현 명성여중고의 전신)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일하면서 다솔사에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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