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8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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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를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말 만당 조직이 일본 경
찰에 발각되어 김정설 선생, 최범술 선생과 같이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고, 출옥 후 다시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
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반대운동의 중심에 섰고, 1948년 5·10
총선거를 관리할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2년에는 문
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한국 교육제도를 정립하는 일을 하였다. 1954년
민의원民議院 의원으로 활약하는 등 정치에도 참여하였다. 1963년에는 동
국대학교 총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삶 전체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이런 와중에 1939년 8월 29일 만해 선생은 다솔사에서 화갑을 맞이하
여 여기를 거점으로 하여 출입하던 인사들과 자리를 함께하며 나라의 앞
날에 관하여 논의를 하고 그때 향나무를 직접 심었는데, 지금도 푸르른 모
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사진 8).
최범술 선생은 일제식민지시기에도 이러한 활동을 했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는 1948년 제헌국회로 나가 제헌의원으로 대한민국헌법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을 건국·출범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4-1956) 선생과 최초 사립대학인 건국대학을 건립하는가 하면 해인 대
학, 계림 대학 등을 운영하는 등 교육제도의 기초를 구축하는 일에도 열
성을 다했다. 학문과 서예, 예술, 다도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과 경륜을
가지고 활동하였기에 1978년 다솔사를 떠날 때까지 문인, 묵객, 학계, 예
술계, 종교계 등의 많은 저명인사들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다. 1919년 해인
사 홍제암에 주석하고 있던 임환경(林幻鏡, 1887-1983) 화상의 상좌로 들어
가 함께 수학한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 1908-1991) 선생과는 평생 형제같
이 지냈는데, 그 인연의 흔적은 청남 선생이 쓴 응진전의 주련으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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