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2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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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을 중심으로 한 교육을 받았으나 세계 지리서인 『영환지략』 등 서양 서적
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특히 1895년 강유위와 함께 강학회를 설립하
고 여러 나라 서적의 번역, 신문·잡지의 발행, 정치 학교의 개설 등 혁신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후 담사동과 함께 변법운동에 진력하면서는 『만국
공보萬國公報』, 『시무보時務報』, 『지신보知新報』 등 계몽적인 잡지를 발간하
여 서양의 신사상을 소개하고 애국주의를 고취하였다. 『음빙실전집飮氷室
全集』, 『음빙실총서飮氷室叢書』,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중국근대삼백
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국역사연
구법中國歷史硏究法』 등 방대한 저술이 있다. 1900년을 전후해 호적胡適, 노
신魯迅, 진독수陳獨秀, 모택동毛澤東 같은 인물들을 포함한 당시의 많은 지
식인들과 청년들이 양계초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았으며, 한용운 등
한국 근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기본적으로 양계초
철학은 국가주의와 도덕주의의 결합을 통해 당시 중국의 상황을 타개해나
가고자 한 것이었다.
일본 망명 시절 다양한 사상 섭렵
양계초의 사상적 입장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고, 크게 몇 가지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는 1896년에서 1898년까지의 변법시기이다. 이 당시 그는
강유위의 조력자로서 입헌군주제로 개혁하자는 무술변법운동에 참여하였
는데, 사상적으로는 강유위의 철학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둘째는 1901년
에서 1903년 초반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가 가장 전폭적으로 서양 문명
을 수입한 시기이다. 1898년 광서제와 강유위의 개혁이 실패한 뒤 양계초
는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1911년 청조가 무너진 뒤에야 중국으로 다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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