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8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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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는 1기의 선배들처럼 일방적으로 유럽의 학풍을 도입한 것만이 아
          닌 불교연구의 독자성을 구축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쟁 통의 유
          럽을 전전하면서 만난 학자들을 통해 동양학으로서의 자기화의 길을 모색

          했을 것이다. 기무라 기요타카는 우이의 학문적 의미는 유럽 유학을 통해

          “역사적 시야에 서서 문헌학 방법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일본 불교연구
          의 백년」, 2005)이라고 평가한다. 우이가 이국에서 대면한 학자들은 당시 유
          럽 불교학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먼저 우이가 최초로 접한 학자는 독일의 리차드 가르베였다. 그는 상키

          야 학파 연구에 정평이 있었다. 기무라 타이켄은 가르베의 『상키야 철학』에
          대해 자료나 출처의 정확성 등 필적할 연구가 없다고 한다. 가르베는 힌두
          교의 『바가바드기타』 독어 번역, 인도사상과 기독교의 상호 영향 관계를 연

          구한 『인도와 기독교』를 출판했다. 우이는 가르베로부터 성실하게 팔리어는

          물론 인도문헌학을 배웠다. 이미 독일에는 영국의 모니엘·윌리암 저 『산스
          크리트-영어 사전』과 필적할만한 『산스크리트-독일어 사전』 7권이 있었
          다. 이는 튀빙겐 대학의 발터 루돌프 로트와 옷토 뵈틀링크가 편찬한 것이

          다. 당시 독일 괴팅겐 대학의 인도학 교수는 헤르만 올덴베르크였다. 베다

          와 팔리어 율장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의 『붓다: 그 생애·사상·교단』
          은 실증적 역사 연구의 성과였다. 우이도 훗날 그를 만났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우이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인도국局 도서관원

          으로 인도학 및 티베트학 전문가인 프레데릭 윌리암 토마스를 만났다. 그의

          도움으로 『승종십구의론』을 출판했다. 토마스는 후에 옥스퍼드 대학의 교
          수가 되었다. 특히 아쇼카왕 비문과 스타인본의 티베트문헌에 정통했다. 우
          이는 당시 인도를 식민지화한 영국의 인도학 연구의 수준을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한편, 독일의 폴 도이센의 인도철학 연구에 대해서는 공부가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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