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3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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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일본에도 유학승을 많이 보냈다. 한편 1910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통합종단 원종의 종정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비밀리에 연합조약을 체
결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한용운, 백용성, 박한영, 진진응 등이 주도하여
조선불교의 독자성을 내세운 임제종 건립 운동이 일어났다. 임제종의 종무
원은 범어사에 두어졌고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의 삼보사찰도 가담했다.
결국 임제종은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못했지만 1912년 서울 인사동에 임
제종 중앙포교원(범어사 교당)이 설립되었다. 범어사는 명정학교 졸업생 가운
데 재능 있는 학승을 선발해 보냈는데 김법린도 이때 서울에 올라왔다. 1917
년에는 휘문의숙에 입학했고, 1930년대 초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안을 작성
한 국어학자 권덕규에게 배우게 되는데 뒤에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게 된 것
도 그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일이다. 김법린은 얼마 후 불교중앙학림으로 편
입하여 1920년에 졸업했다. 불교계에서 설립한 근대적 교육기관은 1906년 명
진학교로 시작하여, 1910년 불교사범학교에 이어 1915년 불교중앙학림으로
학제와 교명이 바뀌었다. 불교중앙학림은 1922년 당국에 의해 폐지되었고,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다시 문을 연 후 1940년 혜화전문학교, 해방 후
인 1946년에는 동국대학으로 이어졌다.
불교중앙학림 재학 시절에는 특강을 하러 온 만해 한용운을 만나게 되는
데, 불교의 전면적 개혁을 주창한 『조선불교유신론』(1913)을 쓴 한용운은 1918
년 9월부터 《유심》이라는 계몽지를 발간하는 등 불교계의 민족주의 운동가
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백용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불교계 대표로 들어갔다. 거사를 하루 앞둔 2월28일 밤 한용운은 김법린을
비롯한 중앙학림 학생 몇몇을 불러 내일의 계획을 알려주고 적극적 활동을
독려했다고 한다. 김법린은 동료들과 인사동의 범어사 포교당에 가서 방법
을 논의했고 다음 날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그는 3월4일 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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