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7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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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38년에 만당의 활동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고초를 겪었고 1942
년에는 민족의식 고취를 빌미로 당국이 탄압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
이를 했다. 그러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자 김법린은 조선불교 혁신회를
조직하고 전국 승려대회 개최를 주동했으며 불교 중앙총무위원을 맡았다.
당시 불교계는 교헌 제정, 교구제와 교도제 실시, 재산통합, 일제 잔재의 청
산 등을 내세웠지만 미군정청 하에서 좌우 대립이 격화되는 등 현실은 만만
치 않았다. 김법린은 미군정청 장관인 하지 중장을 만나 국내에 소재한 일
본 불교 종파의 사찰을 한국 불교계가 인수할 것을 협의하기도 했다.
그는 동국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해 4년제 대학이 된 동국대의 제도적 안착
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와중이던 1952년에는 교육 분야의 능력
을 인정받아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195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
장이 되었으며,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교육행정가이자 정치가로도
활약했다. 1959년에 원자력원장에 취임했고, 1963년에는 모교 동국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지만 이듬 해에 세상을 떠났다.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처럼 김법린은 당시에 찾기 힘든
프랑스 유학생 출신의 선각자였고, 학계와 정계에서 동시에 활동한 불교계
에서 보기 드문 명망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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