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6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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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로 사찰령 체제의 타파, 정교분립과 자율적 교정을 추구하며 불교 개혁
          과 대중화 달성을 목적으로 했다. 만당에는 중앙불전의 학생들도 있었고 만
          해 한용운이 조직을 이끌었는데 1933년에 자진 해산했다. 김법린은 1932년에

          일본에서 돌아와 다솔사, 해인사, 범어사의 강원에서 불교 교학과 영어, 역

          사 등을 가르쳤고 1937년 중앙불전에서 원전 중심의 강의를 했다.
           그는 사찰의 재산 관리처분권과 본말사 주지 임면권을 총독부가 갖는 사
          찰령 체제에 대한 비판의 글을 잡지에 기고했다. 「정교분립에 대해서」(1932)에

          서 그의 현실 인식과 불교 혁신의 방향성을 읽을 수 있다. 김법린은 먼저 교

          정(교단 조직 운영)의 통일은 긴급한 과제임에도 교계의 의식 박약과 당국의 정
          치적 간섭으로 인해 중앙 조직이 만들어지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어서
          일본의 제도에서 나온 본·말사를 둔 본산 체제가 교정의 통일운동에 어떤

          분산 작용을 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그는 외적 질서는 정치가 유지하되 종교는 내적 생명을 향상하는데 주안
          점을 두므로 정교분리의 방향이 옳다고 전제하고, 신을 내세운 종교가 정치
          를 간섭하는 교권 지상의 교국주의, 정치가 종교를 간섭하고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는 전제정치의 국교주의는 배격했다. 다만 과도기에는 국가에서 신교

          의 자유권을 인정하면서도 특정 종교와 종파만 공인하는 경우가 있지만, 결
          국 종교 신앙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고 모든 종교에 균등하게 자주권을 부
          여하는 근대적 정교 분리주의가 옳으며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보았다. 나

          아가 당시의 사찰령이야말로 시대착오적 정치 간섭이며 한국불교의 자주권

          을 부정하는 차별적 행태라고 낙인찍었다. 사찰령 체제의 현실에서 본산 주
          지의 폐해, 중앙 통일기관의 부재, 사찰 재산처분권의 정치적 귀속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고 이에 불교가 더 후퇴하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진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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