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4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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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 내려가 선언식을 거행하고 동래에서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1919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
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몇몇 동지들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로 들어와 불교계에
임정의 소식을 알렸고, 독립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기록들을 모아 임정에 전달하
사진 1. 김법린.
는 역할도 했다. 당시 불교계는 임시정부
의 활동을 위한 자금 모집에 힘을 모았는데, 재정 상황이 좋았던 범어사와
통도사가 큰 몫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의용승군을 조직
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김법린이 이를 위해 활동하다가 일제의 검속이 강
화되자 중국으로 돌아갔다.
1920년 4월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여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 유학을 가려 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는 청년 인재들을 선발하여 프
랑스로 유학 보내는 장학회가 있었고 그곳의 지원을 받아 급기야 1921년 2월
프랑스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이름을 김법린으로 개명하고, 범
어사에서 보내준 여비와 프랑스·일본어 사전만 들고 갔다. 파리에서는 청소
부와 병원의 막일 등을 하며 프랑스어를 배웠고 고등학교와 파리대 부설 외
국인학교에서 공부했다. 1923년 11월에는 파리 대학(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입
학하였으며 1926년 졸업 후 은행에 근무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21개국 170여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세
계 피압박민족 대회가 열렸다. 그는 이때 독일의 이미륵 등과 함께 조선 대
표로 참가하여 일제의 폭압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고 아시아민족회 조선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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