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8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P. 148

전파에 장애가 되었다. …… 천보 연간 초에 하택 화상이 낙양에
              들어와 돈교를 크게 일으키자 그때서야 신수 문하는 방출傍出이며
              법문은 점수漸修임이 드러났다. 이와 같이 돈頓·점漸의 두 종파가

              동시에 유행하자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선별키 위해 남·북으로 표

              시하였는데, 남종·북종의 명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0)


           이와 같이 신회는 지속적으로 북종을 비판하고 남종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북종에서의 반격이 시작되어 천보 12년(753)에 조어사 노

          혁盧弈은 신회를 무고하여 현종玄宗은 익양(弋陽, 현 하남성河南省 연천현演川
          縣)으로 좌천시켰고, 다시 무당군(武當郡, 현 호북성湖北省 균현均縣)에 이주시
          켰으며, 천보 13년에 다시 양주(襄州, 현 호북성湖北省 양양시襄陽市)로 이주시

          켰고, 같은 해 7월 다시 형주(荊州, 현 호북성湖北省 형주시荊州市)의 개원사開

          元寺로 이주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사安史의 난(755년 12월-763)이 발생
          하여 현종은 성도成都로 피난하였고, 국가의 재정이 궁핍 되자 신회 선사
          를 청하여 계단을 설치하여 도승度僧하게 하고 향수전香水錢이라는 세금을

          납부하게 하여 군비에 조달하였는데, 이는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데 절대적

          인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숙종肅宗은 신회를 궁으로 청하여 설법을 들었으며, 전란
          으로 소실된 하택사를 재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회는 건원乾元 원년

          758에 형주荊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입적하였다. 사후에 낙양 보응사寶應寺에

          탑을 세우고 명칭을 ‘반야般若’라 하였으며, 시호諡號를 ‘진종眞宗’이라 하였



          10)  [唐]裴相國問宗密答,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卍續藏63, 31c), “能和尙滅度後, 北宗漸敎大行, 因成
            頓門弘傳之障. …… 天寶初, 荷澤入洛, 大播斯門, 方顯秀門下師承是傍, 法門是漸. 旣二宗雙行, 時人
            欲揀其異, 故標南北之名, 自此而始.”


          146
   143   144   145   146   147   148   149   150   151   152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