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고경 - 2021년 10월호 Vol. 102
P. 57

를 “무산자無産者의 표본적標本的 잡지, 역경아域境兒의 대표적 잡지, 선천
             적先天的 빈혈아貧血兒의 잡지”라고 절규했다(박윤진의 글, 19호, p.46)는 것을
             보면 경제적인 제약으로 인한 어려움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창간의 목적은 “혼탁한 세상에서 일체의 사악을 금강저로 물리쳐 없애

             고 불타의 정법을 옹호하여 널리 확산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세상에 진
             리와 선을 추구하며 불법의 바른 실현을 거스르는 반동적 행위와 흑막에
             가려져 있는 죄상을 폭로하고 격파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었다. 현실적

             으로 보면 조선불교계에 만연해 있는 여러 반동적인 요소, 예를 들어 부정

             과 부패, 시대를 거스르는 교계의 여러 제도와 억압들, 여러 인사들의 퇴
             행적 행태를 여과 없이 비판하겠다는 다짐을 보여주었다.
               『금강저』 창간호는 본국의 불교계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고 많은 관심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권상로가 발행한 『불교』의 창간호(1924. 7)에

             는 『금강저』의 수준을 보고 자괴감에 『불교』를 무료로 배부한다는 기사가
             수록될 정도였다. 유학생들의 자비로 출판하던 『금강저』는 3호부터는 고
             국의 각 사찰에서 동정금이 쇄도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을 정도로

             『금강저』가 국내 불교계에 준 반향은 실로 컸다. 그러나 이후 자금 마련

             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발행인을 포함한 발행의 주
             체들은 자금의 모연에 상당한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종 등장하
             는 발간의 모연을 위한 국내 사찰 답사 기록, 모연금 수집 상황의 기사

             와 광고 등이 이를 반영한다. 그럼에도 1년에 4호가 발행된 것이 최대치

             였으며 점차 횟수가 줄어 1년에 1회 혹은 정간한 해도 없지 않았다. 여기
             에 30년대 후반 전시체제로 진입하고, 내선일체정책을 강화한 일제의 정책
             과 정치 상황에 따라 유학생의 잡지도 지속적으로 간행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사진 2).



                                                                          55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