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고경 - 2021년 10월호 Vol.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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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간호인 26호(1943. 1)는 내선일체운동, 창씨 개명, 조선어 사용금지 정책 등
으로 잡지의 표기가 완전히 일본어로 바뀌었고 친일적 논설도 게재되었다.
동경불교유학생들이 학술 연찬 이외에 국내 불교계의 움직임과 교정의
발전 방안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인 이유는, 대부분의 유
학생이 귀국하면 바로 자신들의 출신 사찰로 돌아가야 했던 현실적인 이
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주지에 대한 반감과 비판은 이들 유학생의 미
래와 직결된 문제로서 매우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유학 시
절 개혁의 목소리를 목청 높여 외치던 선배들이 귀국하여 본사로 돌아가
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현실에 대한 고민과 불만도 없지 않았다. 이상
과 현실의 차이를 젊은 유학생 승려들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술 논문 성과
『금강저』에는 일본 유학생이 입국하여 귀국하는 모든 경과가 일지처럼
기록되어 있다. 유학생들의 자체 학술발표회도 마찬가지여서, 「우리 뉴-스」
란에는 유학생들의 학부와 졸업논문 제목이 소개되어 있으며, 일부 유학
생의 졸업논문이 본문에 게재된 경우도 많다.
『금강저』에 수록된 학술 논문을 앞서 구분한 4기로 나누어 제시하면 일
정한 경향성이 도출된다.
제1기, 즉 1920년대 후반에 간행된 15-17호에는 석존과 불타의 본질론,
자연과학 및 사회주의와 종교의 관계를 고찰한 논설이 주목된다. 현해탄
을 건너와 새롭게 얻은 불교 교리와 교주에 대한 지식에 자신의 철학적 사
유를 가미한 글이 많고, 당대의 시대사조인 사회주의, 자연과학의 지식을
종교와 접맥시킨 논의도 있다. 이외에 최범술의 「불타의 계에 대하여」는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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