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고경 - 2021년 11월호 Vol.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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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는 한치윤과 그의 조카 한진서가 「석지」를 편찬하면서 외국의 기록
인 본문에 대한 보충 설명이나 오류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인용한 조선의
문적이다. 조선 후기의 사서 편찬은 중국 중심의 자료를 널리 수집하고 분
류 정리하였으며, ‘안설按說’이나 ‘운설云說’ 등의 표현으로 자료에 대한 찬자
의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일반적인 편사 방법이었다. 때문에 이러
한 편사 방법이 불교사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에 관한 것을 다루기보다는
연대나 지명 고증 등 불교사에 부수적인 사항들에 관한 견해 제시에 그친
한계라고만 볼 수 없다.
살펴보건대, 『동국여지승람』에는 “연복사演福寺는 송악松嶽의 도성
중부에 있다. 옛 이름은 보제사普濟寺이며, 대전을 능인전能仁殿이
라 하고, 그 앞문을 신통문神通門이라 한다.” 하여 『고려도경高麗圖
經』에 실려 있는 것과 내용이 같다. 『고려사』에는 “충렬왕 12년에 보
제사에 행행하여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보
제사를 연복사라고 이름을 고친 것은 대개 충렬왕 이후의 일이다.
『고려도경』의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에 대한 내용을 그대로 수록한 본문
은 보제사의 전각의 규모와 탑에 대한 설명뿐이지만, 한치윤은 『동국여지
승람』과 『고려사』의 기록을 토대로 보제사가 사명寺名을 연복사로 고친 사
실이나 그 시기를 고증하고 있다. 한치윤이 「석지」의 편찬에 조선의 문적을
활용한 것은 중국 측 자료를 이용한다고 해서 『삼국사기』나 『고려사』와 같
은 국내 기록을 무시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는 외국 측 기록이라 하
여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국내 측 자료와 비교하여 외국 측 자
료의 잘못된 서술을 바로잡고 있다. 때문에 「석지」는 유득공이 서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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