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8 - 고경 - 2021년 11월호 Vol.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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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기를 청하였다.
                                                 이에 체징선사는 가지산사
                                               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 가

                                               지산사는  이미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 당나라와 인도
                                               에서 유학하고 월지국에서 중
                                               국을  거쳐  신라로  귀국하여

                                               화엄종을 대대적으로 펼치며

                                               큰 역할을 했던 원표元表 대화
                                               상이 주석하던 곳이었고, 경
                                               덕왕 18년인 759년에 나라에

                                               서 이 사찰에 장생표주長生標

                                               柱를 세워 사원의 전답을 내리
          사진 7.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호).
                                               고 대대적으로 물적인 지원을
          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유서 깊은 곳에 체징선사가 주석하게 되자 860년 김언경은 제자

          의 예를 갖추고 그 문하의 빈객이 되어 사재를 내어 철 2,500근을 사서 노
          사나불을 주조하여 선사가 머물고 있는 절을 장엄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
          라에서는 교敎를 내려 망수望水, 이남택里南宅 등으로 하여금 금160분分과

          조곡租穀 2,000곡斛을 내놓아 절을 번창하게 하고, 이 가지산사를 왕의 교

          서敎書를 작성·공포하는 국왕 직속기관인 선교성宣敎省에 속하도록 하였
          다. 망수택과 이남택은 신라 부호 귀족들의 가장 호화로운 집인 금입택金
          入宅을 말하는데, 당시 서라벌에는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 이 가운데 두

          금입택에서 시주한 재산은 답畓 1,333결結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8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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