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9 - 고경 - 2021년 11월호 Vol.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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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왕哀莊王(800-809) 7년 이후
             부터 불교 도구를 만드는 데 금은
             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이 당시에 금을 시주하게 한 것이

             눈에  띈다.  861년에는  사방에서
             물자를 보시하게 하여 절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낙성일에는  체징

             선사가 친히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왕실과 진
                                              사진 8.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보물 제439호)
             골 귀족들이 체징선사를 어느 정
             도로 숭모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왕실과 진골 귀족들이

             선종의 고승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당시의 상황도 짐작할 수

             있다. 이때가 되면, 신라의 왕실은 점차 안정을 상실해 갔고 지역에서는 호
             족들이 선종을 지원하여 불교의 지지를 얻어 가면서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으므로 왕실도 선종의 선사들을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후 체징선사는 자신이 도의선사, 염거선사를 이은 가지산파의 3조임
             을 분명히 하여 종통을 세우고 제자 영혜英惠 화상, 청환淸奐 화상 등 800
             여 명을 길러내면서 선종의 종풍을 드날렸다. 880년에 입적하니 나이 77

             세였다. 883년에 문인 의거義車 등이 행장을 모아 왕실에 비명을 세워 불

             도를 밝혀줄 것을 청하니 왕이 이에 응하여 시호를 보조普照라고 하고, 탑
             호를 창성彰聖이라고 하며 절의 이름을 보림사寶林寺라고 지어 내렸다. 이때
             부터 가지산사의 이름이 보림사로 바뀌었다. 이러한 내용을 적은 비를 884

             년에 세우니, 이것이 전액篆額에 ‘가지산보조선사비명迦智山普照禪師碑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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