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1 - 고경 - 2021년 11월호 Vol.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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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 저수량褚遂良(596-658)풍의 해서로 썼다(사진 3). 두 사람이 비문을 나
             누어 쓴 것이 매우 특이하다. 김원은 당시에 오늘날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
             미암면美巖面 일대인 무주 곤미현昆湄縣의 현령縣令으로 있었는데, 선림원

             지禪林院址에 있었던 「홍각선사비弘覺禪師碑」의 비문도 그가 지었다. 체징선

             사비의 글씨를 새긴 사람은 흥륜사興輪寺의 승려인 현창賢暢이다.
               전액은 소전小篆에 가까운 전서篆書로 되어 있는데(사진 4), 887년 최치
             원崔致遠(857-?) 선생이 짓고 구양순·구양통풍의 해서로 비문의 글씨를 써

             서 쌍계사雙磎寺에 세운 「양해동고진감선사비敭海東故眞鑑禪師碑」의 전액에

             서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쓴 것과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사진 5). 과두문자 등
             고문자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연구는 조선시대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
             1682) 선생에게 와서 전개된다. 그는 그의 문자학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미수체眉叟體’의 글씨

             를 구사하였다(사진 6). 그 후 문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추
             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이다. 허목 선생과 김정희 선생은 조선
             의 사대부들이 문자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그 법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

             고 당시 유행하는 일부 중국 서예가들의 글씨를 베끼며 평생 글씨를 보기

             좋게 쓰려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세태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
             였다. 추사 선생의 글씨는 기본적으로 그의 문자학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것이고, 조선의 금석학은 바로 문자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비는 나말여초의 일반적인 석비石碑의 양식에 따른 것으로 현재도 이

             수螭首, 귀부龜趺, 비신碑身이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비의 글을 지은
             사람, 글씨를 쓴 사람, 글씨를 돌에 새긴 사람의 이름이 분명히 밝혀져 있
             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크다. 이수에는 구름 문양의 판형 위에 9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비신을 받치고 있는 비좌에도 같은 모양의 구름 문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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