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7 - 고경 - 2021년 11월호 Vol.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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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에서 한국을 ‘석탑의 나라’, ‘석등의 나라’라고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설
득력이 있는 관점이다.
보림사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승탑과 승탑비, 삼층석탑, 석등이 완
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특히 석탑의 상륜부의 장식이 지금까지 훼손됨이
없이 완전하게 남아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이러한 온전한 모습을 갖
추고 있는 불교 문화재를 보려면 여기에 오면 된다.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좌상은 중생을 의미하는 왼쪽 집게손가락을 법계
를 뜻하는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형태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이 좌불은 왼쪽 팔 뒷면에 주조한 내력을 양각의 명문으로 분명하게 새겨
놓은 것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명문의 내용에 의하면, 무주武州
장사현의 부관副官 김수종金遂宗이 석가모니 입멸 후 1808년이 되는 858년
(大中 12년) 7월 17일에 정왕情王 즉 헌안왕憲安王에게 불상 주조를 아뢰고,
왕이 8월 22일 조칙을 내려 859년에 불상을 만들었다(사진 12). 이는 보조
국사비의 내용에 김언경金彦卿이 자신의 재산으로 철 2,500근을 사서 노
사나불 1구를 주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상충된다. 이와 관련해
서는 김수종과 김언경은 동일한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보림사 양 탑
의 탑지塔誌에 경문왕 10년 870년에 왕이 헌안왕의 왕생극락을 위하여 탑
을 세웠으며, 지금의 청주 지역인 서원부의 소윤으로 있는 김수종이 왕의
칙명을 받들어 한 것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김수종이 860년에는 철불을
주조하여 시주하고, 870년에는 왕의 명을 받아 석탑을 세운 사람인 것이
맞으므로 김언경이 나중에 비문을 쓸 때 철불을 주조하여 시주한 사람을
자기로 바꾸어 썼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른 경우에는 볼 수 없는, 비문
의 글씨를 김원과 김언경이 나누어 쓴 것에 필히 어떤 곡절이 있을 것이라
고 의문을 가져보면, 김언경이 비문을 쓰면서 내용을 개작한 것이라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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