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고경 - 2021년 11월호 Vol. 103
P. 40

중불교의 역량이 결국에는 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독립의 의미를 불교사 연구
                                   성과를 빌려 설명하자면, 황실에 기대어 축

                                   리祝釐[복을 빎]로만 운영되다시피 하던 기존

                                   사원에 경종이 된 사건이다.
                                     그 결과 선종사원은 ‘불립불전 유수법당不
                                   立佛殿 唯樹法堂[불전 말고 법당만 세워라]’이라고

                                   하여 외부에 기대는 불전은 세우지 않고 스
          사진 1.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
                                   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법당만을 세우
          는 것을 원칙으로 삼게 된다. 이러한 조치로 농선일치農禪一致를 통해 노동
          과 수행을 하나로 보고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며 독립적인 수행공동체를

          만드는 전통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에서의 선풍은 우리나라에도 들어오는데, 9세기 초
          반 유학승들에 의해 소개된 선에 대해 신라의 중앙세력은 거부하였으나 지
          방 호족세력은 수용하게 된다. 이때 개창한 선찰禪刹을 살펴보면 현재까지

          모두 불전이 건립되어 있다. 당시 선찰이 생기는 과정은 새롭게 사찰을 짓

          는 경우보다는 기존 사찰이 선을 수용하는 사례가 더 많았기 때문에 불전
          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지방 호족세력의 후원 때문에라도 그
          들을 위한 축리祝釐 또한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굴산개조 범일의 위상


           사굴산闍崛山이란 기사굴산耆闍崛山을 줄여서 말하는 것으로 더 줄여 ‘

          굴산崛山’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굴산은 영축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38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