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2 - 고경 - 2021년 12월호 Vol.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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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났다. 인원은 7~8명으로 양쪽이 비슷하였으나 비구 측은 20대 학인이
었고, 대처 측은 결혼한 파계승들이었다. 대처 측이 먼저 고소하자 비구 측
도 맞고소하여 다음 날 양쪽이 다 지서에 가게 되었다. 그때 고우스님은 발
목이 접질려 걸을 수가 없었다. 지서에서 대처 측이 이빨이 부러지고 많이
다쳤다고 하자 우리 쪽에서는 고우스님이 아주 심하게 다쳐 걸을 수도 없
어 못 왔다고 한 모양이다. 지서에 가 보니 사태가 좀 심각하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고산스님이 주재하는 대책회의에서 고우스님을 비롯해 세 사
람이 주모자로 책임을 지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는 군인들이 정권을 잡아 사회 기강을 잡는다고 깡패 단속
이 아주 심할 때였다. 경찰은 깡패나 부랑자들을 잡아다 반쯤 죽도록 패
고는 제주도로 끌고 가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당시는 인권이고 민권 같은
게 없었다. 이대로 잡혀가면 어찌 될지 알 수 없으니 책임지기로 한 세 사
람이 도망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고우스님과 해인사 율주를 지낸 종진
宗眞 스님, 수좌 기성寄星 스님은 수도암으로 올라가 수도산을 넘어서 도망
을 갔다.
한겨울에 홑옷에 흰 고무신을 신고 수도산을 넘어 도피한 곳이 영주 부
석사였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부석사에 잘 도착했
다고 띄운 편지에 고산스님은 경북 도내에 지명 수배가 떨어졌으니 도를
벗어나라고 답신을 보내왔다. 그래서 영주 부석사보다 더 깊은 봉화 문수
산 축서사로 갔다. 당시 비탈의 암자였던 축서사에 가보니 노스님 한 분이
반겨 주시어 머물게 되었다. 고우스님은 뜻밖의 정화사태로 산중 깊은 곳
으로 도피하며 봉화와 첫 인연을 맺게 되었고, 후일 축서사 주지도 지내고,
각화사 동암, 서암을 오가며 머물다 마침내 70대에 금봉암을 창건하여 주
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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