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고경 - 2021년 12월호 Vol.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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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방을 드리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평면인데, 이것
만 골라도 당시 선암사에 요사가 9동이나 된다.
선암사는 1754년 일 천 수백 명이 훨씬 넘는 인원이 몰려 화엄대회를 열
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교통이랄 것이 없었던 당시, 전국에서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 정도의 인파가 몰릴 정도라면 화엄학에 대한 대중들의
열기는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리고 대회가 3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하
니, 이 그림에서 나타난 선암사의 모습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광사의 상황도 비슷했다. 송광사는 조선 초부터 이어지던 가람이 이
후 몇 차례 화재로 위기를 겪었으나 전소되는 피해는 입지 않아서 옛 모습
에서 조금씩 변하면서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송광사 건물 위치도 및 평
면도’(사진 2)는 1928년에 작성된 사역의 배치도인데, 이 그림이 작성되기
직전까지 있었던 요사터를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터까지 모두 합치면 송
광사도 선암사에 뒤지지 않는 대형 요사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당연히 두 사찰은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조하며
법등法燈을 이어 온 사찰이니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는 사찰의 규모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요
사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시기로 사찰로 사찰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요사의 진화
요사란 생활 공간으로 처음부터 크게 지었던 것은 아니다. 기록을 통해
서도 요사의 규모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알 수 있지만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남아 있는 요사를 관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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