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고경 - 2021년 12월호 Vol.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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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들에게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여건이 불비하단 말이기도 하다. 하지
만 그보다도 사찰을 중심으로 모여든 대중들이 계를 통해 보사활동을 전개
할 만큼 적극적이고 활발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현재 사찰계는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데,
당시 계가 없는 사찰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사찰에서 계가 성행했다. 특히
18세기 이후로는 사찰 재정 기반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뚜렷한 활약을
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계의 활동은 계원이 모여 식리殖利와 수행에 관해 의논하고, 신행에도 참
여하였기 때문에 이에 맞는 공간이 필요했을 텐데, 바로 그것이 대형 요사
였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사찰에서 대형 요사의 확산은 가히 폭발적이
라 할 수 있는데, 특별한 행사 때나 사람이 모이던 이전과는 달리 상시 사
찰에 비교적 많은 대중이 상주하며, 이곳을 중심으로 사찰이 운영되던 새
로운 패턴이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굴곡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지배자인 성리학
이 아니라 지배당하던 불교이다. 격변을 거치던 조선 사회에서 그 누구도
정확히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몰랐던 것은 유불儒佛이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불교는 대중과 함께했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고 제자리에서 버티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모으는 데는 성공하여 버틸 체력은 길렀지
만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다.
암튼 이런 아쉬움은 있지만 조선시대 사찰 건축에서 가장 훌륭한 건축
은 화려하게 장식된 법당이 아니고, 구불거리는 기둥과 약해 보이는 서까
래를 썼어도 힘주어 요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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