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고경 - 2021년 12월호 Vol.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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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였고, 조선 초의 한글 경판을 발굴하고 국보적 가치를 잡지를 통해 강
          조함으로써 한글문화의 창달에 기여하였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세한글 연구가 자료적으로 만해의 발굴 성과에 기초하고 있다

          는 점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크게 상찬받아 마땅하다.



                            불교 문학청년을 배출하다



           문학란은 연도별로 변화가 수반되었다. 먼저 1931년의 가장 큰 변화는

          권두언 시를 수록한 것과 「불교시단佛敎詩壇」을 신설한 것이다. 만해가 편
          집을 맡은 84·85호부터 『불교』지에는 약간의 체제 변화가 따랐는데, 먼
          저 권두언에 편집인의 시를 수록하는 체제가 다시 갖추어졌다. 그리고 87

          호(1931.9)에 「불교시단」을 신설하고 호마다 다수의 불교 청년의 시를 게재

          하였다. 만해 등장 이후 90호(1931.12)까지 등장하는 시 투고 작가는 이광
          수, 이병기, 리범신, 류엽, 영매학인, 조종현(탄향), 강유문(유문), 홍해은,
          최설천, 김어수 등인데, 조종현의 작품이 가장 많이 수록되었다. 이 시기

          는 조종현, 김어수 등의 강원 소속 작가, 강유문(중앙불전) 등의 전문학교 학

          생 작가가 등장하는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1932년 이후 종간호까지의 변화는 「독자시조단讀者時調壇」과 「독자문단讀

          者文壇」을 신설한 것이다.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불교사는 94호(1932.4)
          부터 다시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 직영으로 전환되어, 지사를 폐지

          하고 각 본산 종무소에서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기존에 지사제를 홍
          보하면서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독자와의 소통이었는데, 교무원으로 전
          환하게 되면서 전과 다른 방식으로 독자의 참여를 유도해야만 하였다. 이

          는 「불교시단」 「독자시논단」 「독자문단」란을 신설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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