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고경 - 2021년 12월호 Vol.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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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갔다.” 겸손의 말씀이
긴 하지만 어느 분야든 아주
상근기와 하근기만 남고 중근
기는 떠나가게 마련입니다.
한세상 살아갈 때 운運도 따라
야 하지만 둔하고 근기가 있어
사진 3. 성철스님과 법전스님(해인사 백련암 염화실 앞).
야 성공하는 법입니다. 지금
도 “내가 혹시 너무 똑똑한 건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는 잣대로 삼는 말씀
입니다.
법전스님은 6년 결사를 맺으면서 하루에 나무 한 짐하고, 한 시간씩 밭
을 매게 했습니다. 스님은 쌓아놓은 수천 개의 장작 가운데 단 한 개라도
튀어나오면 다 밀어버렸답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처음부터 다시 깐충하게
쌓아올렸다고 합니다. 단순한 작업을 정성을 다해 반복함으로써 근심 걱
정을 벗어나 평정심을 찾은 걸까요(사진 3).
수도암에는 재래식 해우소가 있습니다. 앞 문짝도 없고, 변기 아래가 허
공으로 확 트여 있습니다. 겨울에 여기에 앉아 볼일을 볼라치면 잡생각 많
던 마음도 시린 엉덩이 때문에 단순해지지 않을까요. 우리들은 너무 안락
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잡생각이 많아져서 불행한지도 모릅니다.
변기 아래가 탁 트여 있는 것을 보노라면 풍류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
릅니다. 아래가 훤히 트여 있으니 바람이 잘 통하지 않겠어요. 바람이 잘
통하는 측간이야말로 불풍류처야풍류不風流處也風流입니다. 이 선어禪語는
불가佛家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말입니다. 『벽암록』 제67칙의 착어著語를 비
롯해서 여러 문헌에 용례가 보이지만 오늘은 『오등회원』의 글을 인용해 보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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