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5 - 고경 - 2022년 1월호 Vol.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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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선白坡亘璇(1767-1852)의 『선문수경禪
文手鏡』의 선론禪論을 반박하기 위한 저
술로 이들의 선 논쟁은 점차 확대되어
반세기 이상 조선 후기 선종사를 지배
했으며, 당시 선학禪學이 발전할 수 있
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초의는 당대의
유학자였던 다산 정약용과 해거도
위海居都尉 홍석주洪奭周, 자하紫霞 신
위申緯,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시를 주고받는 등 폭넓게 교유하니
“옛 동림사東林寺의 혜원慧遠이나 서
사진 2. 초의의순 선사(1786-1866).
악西嶽의 관휴貫休라 지칭하여 명성이
일시에 자자했다.”라고 한다. 특히 정약용과의 교유는 유서儒書와 저술에
대한 법을 익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시도詩道 또한 다산에게서 배웠는
데, 그 천기天機가 넘쳐흘렀다. 1813년 51세의 정약용이 26세 초의에게 보
낸 글에는 시에 대한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다.
시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본디 뜻이 저속하면 억지로 청고
한 말을 하여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본디 뜻이 편협하
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하여도 사정에 절실하지 못하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려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
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알고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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