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1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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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와 마찬가지로 시국 강연, 학병 동원, 군수물자 기부 등에 동참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김태흡은 주지 분쟁으로 공석이 된 봉은사
의 주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전 주지를 살해하도록 사주했다는 혐의로 8
년 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 일로 그는 5년 동안 복역했지만 출소 직후 진
범이 잡혀서 누명이 벗겨졌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후 그는 대외적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저술과 강원에서의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그 외에는
1961년 팔만대장경 번역편찬위원, 1968년 동국대 역경원 한글대장경 번역
위원 등 오직 대장경의 한글 번역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는 저술로 『석가
여래일대기』(1974), 『신앙의 등불』(1975) 등을 남겼는데, 이 책들은 불교의
교리와 사상, 신앙을 알기 쉽게 쓴 대중 입문서였다. 1989년 4월 13일 서
울 상도동 사자암에서 입적했으며 당시 법랍 84세, 세수 91세였다.
김태흡은 1920년대에 일본에 유학한 인텔리 지식인이었고, 불교의 역사
와 당면한 불교 대중화 및 현대화에 관한 많은 글을 잡지에 실은 학승이었
다. 또 불교 포교의 일선에서 뛰며 다양한 장르에 걸쳐 창작 활동을 했던
시대의 선구자였다. 비록 한국불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었지
만, 불교의 과거와 현재의 문제에 깊은 이해를 가지면서 미래의 길을 모색
하려 한 개척자였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 말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그의
삶과 종교적 지향은 도매금으로 넘어갔고, 세간의 기억에서 잊힌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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