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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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에서 태어났고 3세에 서울로 이사했는
          데 군관이었던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가
          세가 기울었다. 1906년 외할머니의 권유로

          7세의 어린 나이에 철원에 있는 심원사로

          출가했다. 처음에는 범패를 익히다가 1912
          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사미과의 교재를 배
          웠다. 이후 건봉사·용주사·마곡사·법주

          사 등에서 조선후기 이래 전통적 승려 교육
                                                 사진 1. 김태흡金泰洽(1899~1989).
          과정인 이력과정의 사집과·사교과·대교
          과를 순차적으로 이수하였다. 1918년 법주사에서 최고 단계인 대교과를 마
          쳤고, 다음해에 21세 약관의 나이로 진하축원에게 전강을 받고 법주사의

          강사가 되었다. 축원은 『선문재정록』을 지어 19세기 선 논쟁의 대미를 장

          식한 이였다.
           1920년 봄에 김태흡은 문경 대승사의 초청으로 강주가 되어 학인들
          을 지도했는데, 이때 앞서 법주사에서 만난 적이 있던 이영재와 재회했

          고, 그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영재는 한국불교사를 연구한

          학승 김영수에게 교학을 배웠고, 1920년 일본의 니혼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재일조선불교청년회 창립을 주도했고, 기관
          지 『금강저』의 편집을 맡았다. 이후 도쿄대학 인도철학과에 들어가 산

          스크리트와 팔리어를 공부하고, 1925년 원어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갔다가 1927년 풍토병으로 요절했다. 이영재가 1922
          년 신문에 연재한 「조선불교혁신론」은 민주 공화정 이념과 권력 분립을
          기조로 하는 혁신 교단 건설과 불교 근대화, 그리고 사찰령 철폐를 주

          장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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