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6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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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1896년 양계초 등이 상해에서 창간한 『시무보時務報』. 장태염은 한 때 이 잡
지의 편집을 맡았다.
이라는 글에서 공리주의, 사회진화론, 유물론, 자연주의의 네 가지 사상을
비판하였고, 이것이 그의 사회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다 마
침내 신해혁명 바로 전해인 1910년 자신의 대표적 저서인 『제물론석齊物論
釋』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장자』 「제물론」 편을 유식불교를 통하여 해석한
것으로, 자신의 사회사상과 불교사상이 잘 드러난 중국 근대철학사의 3대
명저에 속한다. 장태염 자신도 “『제물론석』의 논의는 글자 하나가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였지만 반봉건· 반외세의 근대국
가는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더 급진적인 정치 흐름이 나타
났다. 그리고 그 사이 장태염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어
버렸다. 1926년 그는 국민정부가 시도한 북벌전쟁에 반대하였고, 이후에
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학문 영역에서만 활동하였다. 청말 이후 사라져가
는 국학 전통의 계승에만 힘을 다하였고, 그 결과 ‘국학대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청대 학술이 장태염을 통해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을
끼쳤으나, 1936년 그는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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