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3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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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라 중국 학술의 중심인 고경정사詁
                                         經精舍에 입학하였다. 고경정사는 1801년
                                         청대 고증학자 완원阮元이 설립한 청대

                                         고증학의 산실로서 강남 최고의 서원이

                                         었다. 장태염은 고경정사에서 공부를 시
                                         작하였고, 7년 동안 매우 엄격한 경학 공
                                         부에 전념하였으며, 학문적 두각을 나타

                                         냈다.
             사진 1. 태염太炎 장병린章炳麟.
                                           고경정사를 만든 완원이 청대 고증학
             의 맥을 이었던 만큼 그 역시 송대 주자학에 비판적 태도를 나타냈고, 유
             학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바로 초기 유학을 대하였다. 고경정사

             에서의 이 학문적 엄격성에 대한 훈련과 몰입을 통해 그는 나중에 ‘국학대

             사’라는 호칭까지 들을 정도로 학문적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그는 평생 이
             러한 학문적 엄격성을 유지하였고, 중국 고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
             으로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하였다.

               나이 28세 때인 1895년, 장태염은 고경정사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고

             있으면서도 현실 개혁에 대한 욕구와 청나라에 대해 반감이 있었다. 그러
             한 연유로 상해에서 강유위가 설립하였던 ‘강학회’에 가입하였다. 1896년
             양계초 등의 개혁 인사들이 상해에서 잡지 『시무보時務報』를 창간하였는데,

             장태염에게 편집을 부탁하였다. 장태염은 그 부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가

             르쳐 온 스승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경정사를 그만두었다.
               고경정사에서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기도 했지만, 학문이 뛰어난 장태염
             이 정치가가 되기보다는 학자로 남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역시 계몽잡지

             『시무보』 편집으로 현실 참여의 길에 들어섰지만, 유학을 종교로, 공자를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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