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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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현재의 문자 환경에서 보면 쉽지 않은 어휘들이 산을 이루고 있는 것처
럼 보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새로운 번역과 해설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
러나 새로운 울림을 갖는 언어는 어떤 기술이 아니라 깨달음에 수반하는
하나의 선물이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선문정로』에 대한 쉬운 이해와 바른 실천을 가로막는 현실적 장애가 또
하나 있다. 돈점논쟁이다. 『선문정로』는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기준들을 제
시하여 수행자 스스로 자기 수행을 점검해 볼 수 있도록 한 수행 지침서이
자 진위 감별서이다. 그런데 『선문정로』의 설법이 극단적 부정과 비판과 배
격의 언어로 전개되다 보니 이로 인해 촉발된 논의 역시 옳고 그름을 가리
는 논쟁의 방식으로 진행된 경향이 없지 않다. 돈점논쟁이 그것이다. 물론
『선문정로』로 인해 촉발된 돈점논쟁은 한국 불교학 연구의 역사에서 일정
한 의의를 갖는다.
그럼에도 이 뜨거운 논쟁으로 인해 『선문정로』가 시비의 틀에 갇혀 수행
지침서로써의 본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된 감이 있다. 이 엄청
난 저작을 읽어볼 뜻을 낸 사람들조차 십중팔구 여기에 따라다니는 논쟁
의 흔적들을 소환하여 함께 시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리곤 한다. 아이
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문정로』에 정통성의 측면에서 시비를 가려보자는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궁극적 지향은 화두참구를 통해 시비분별에서 벗어
난 무심의 실천과 완전한 무심의 성취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데 있다. 이
처럼 시비분별을 벗어난 길을 걸어보자고 제안한 이 책이 도리어 시비의
현장이 되고 만 것이다.
성철스님은 어째서 시비분별을 벗어난 무심의 성취를 강조하는 법문을
하면서 이렇게 시비를 가르는 방식을 취한 것일까? 성철스님은 궁극의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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