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9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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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의 창건주


               애암은 창건주 아도화상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창건주 아도는 두

             명으로,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파견한 아도는 374년에 고구려에 왔고, 또

             한 사람은 신라 비처왕毘處王(재위 479~499)때 시자 3명을 데리고 신라 모
             례毛禮의 집에 수년간 머무르다 병이 들어 죽은 고구려의 아도라는 것이다.
             애암은 중국의 아도와 대둔사의 창건은 100여 년 이상의 차이가 나며, 비처

             왕 원년(479)부터 대둔사를 창건했다는 514년까지는 36년의 차이가 난다.

             고구려의 아도가 대둔사를 창건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암은 고구려의 아
             도마저도 신라 모례의 집에 머물다 병들어 죽은 것으로 이해했다.
               법흥왕 때 아도 창건설에 대한 부정은 초의草衣에 의해 진흥왕 창건설

             마저도 부정되었다. 초의는 ‘법흥왕 때만 해도 아도의 뼈가 해를 지났는

             데 하물며 진흥왕 때까지 남아 있었을까’ 하는 강한 의심을 품는다. 결국
             애암과 초의는 대둔사 창건에 대한 『죽미기』와 『여지승람』의 기록을 철저
             히 부정했다. 그들은 대둔사가 호남의 사찰이 대부분 신라가 통일을 이룩

             한 후에 창건되었음을 전제로, 660년 백제의 멸망 이후 백제의 고을들이

             점차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된 신라 말엽쯤 도선道詵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
             했다.



                  “자장법사가 당에 들어가 불법을 구하여 원향圓香을 이별하고 신라

                  에 돌아와 대둔大芚·황룡黃龍·태화太和·월정月精 등의 가람을 일
                  시에 중건하였다. 그 후 도선이 당에 들어가 일행一行과 이별하고
                  신라에 돌아오니 대둔사는 그때 가져 온 동방산수도東方山水圖의

                  3,800개 비보소裨補所 가운데 점 찍혀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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