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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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죽미기』는 자장과 도선이 중국에서 귀국한 이후 대둔사를 중건한
          것으로 적고 있다. 찬자 색성賾性은 이에 대해 “자장이 당에서 귀국한 선덕
          왕 12년(643)은 아직 백제가 멸망하기 전으로 신라승인 자장이 백제 땅에

          있는 대둔사를 중건하지 못하며, 이미 신라에는 황룡사가 창건되어 신라

          의 큰 사찰이 되었고, 진평眞平·선덕왕善德王 때에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강
          경과 설법을 행했는데 대둔사를 중건했다는 것은 맹랑한 것”이라고 비판
          했다.

           초의 또한 도선의 대둔사 중건설에 대해 『불조통재佛祖通載』와 최유청崔

          惟淸이 찬한 도선의 비문을 기초로 『죽미기』뿐만 아니라 1653년 도갑사道岬
          寺에 세워진 이경석李景奭의 「도갑사도선비명道岬寺道詵碑銘」과 「도갑고기道
          岬古記」·『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비판했다. 초의는 일행선사는 725년에

          입적했고, 도선은 827년에 태어났다. 일행이 도선에게 말한 ‘아들(왕건)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 왕건은 876년에 태어났음을 거론하여 일행과 도선
          의 만남이나 일행의 왕건 출생에 대한 예언까지도 부정했다. 『대둔사지』 찬
          자들은 오히려 도선을 대둔사의 창건주로 인정하고 있다. 윤우尹佑는 “신

          라의 불교가 크게 흥성한 헌강왕憲康王 대에 도선이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곳에 사찰을 건립케 하였을 것 같고, 대둔사도 이때에 창건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확신했다.
           찬자들의 『죽미기』 비판은 대둔사가 원효나 의상과의 관련설에도 계속

          된다. 『죽미기』는 “원효가 대둔사 해회당海會堂에 머물렀으며, 의상은 당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극복하고자 신인神印 스님을 시켜 통도사·화엄사와
          함께 대둔사에 밀단密壇을 설치하고 기도를 드리게 하여 침략을 면하게 되
          었다.”고 기술했다.

           이에 대한 찬자들의 전반적인 인식은 “원효와 의상의 흔적이 대둔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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