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2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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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했고 “서토불사西土佛寺의 창사創寺에 대한 글과 승인僧人의 현화現化한
발자취가 모두 틀리고 어그러져(違舛) 전부를 믿기 어렵다.”고 하여 『삼국
사기』 기록 자체에 대해 불신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밖에 다산은 “묵호자墨
胡子가 고구려에서 신라로 온 때는 『삼국사기』가 표기한 소량蕭梁 때가 아
님을 밝혔으며, 374년 고구려로 온 중국의 아도가 479년에 신라로 왔다
는 『삼국사기』 기록은 100여 년 이상의 차이가 있어 잘못되었다.”고 했다.
불교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인식
이상의 『대둔사지』 찬자들의 지적은 불교사 인식의 차원에서 다음 몇 가
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나라 고대불교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꼽
을 수 있다. 찬자들은 대둔사의 창건과 중건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죽미
기』의 내용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이해한 고대사와 불교사 지식을
활용한 것이다.
고대 삼국의 불교전래에 대한 사정과 삼국의 정세, 영토와 인물들의 생
몰년에 이르기까지 불교사 전반에 걸쳐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찬자들
의 이러한 고대사에 대한 폭 넓은 이해는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분석에서
이루어졌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 고대불교사를 복원하고 체계화시
키고자 했던 그들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둘째, 『삼국사기』의 신라 중심의 불교사 찬술을 비판한 것이다. 다산은
『삼국사기』 불교관계 기사를 기초로 찬술한 고구려·백제·신라 선교의
시말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사 기록이 소략함을 지적했다. 『삼국사기』
는 393년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한 이후 100여 년 후인 497년
문자왕 7년에 금강사金剛寺를 처음으로 창건했음을 기록했다. 다산은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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