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1 - 고경 - 2022년 5월호 Vol.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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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지  않았고
             증빙할 수 없음
             에도  불구하고

             대둔사의  선

             덕先德으로  추
             대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초의
                              사진 2. 『죽미기』는 『삼국사기』를 근거로 대흥사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는 원효와 의상

             은 문무왕 때의
             인물로 이때는 백제가 이미 망했지만 유인궤劉仁軌와 유인원劉仁願이 군사
             를 이끌고 호남에 머물고 있어 신라 스님이 대둔사에 주석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신라와 당이 군사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

             려를 멸한 이후로, 당은 신라와의 맹약을 깨고 동방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로 660년 백제를 멸한 직후 그 옛 땅에 웅진도독을 두고, 그
             밑에 7주 52현을 설치했다. 웅진도독은 유인궤가 임명되어 백제의 옛 땅

             을 당의 관할에 놓았던 것이다.

               초의는 또한 『죽미기』에 나타난 원효암과 의상암이 “대둔사에 오랫동안
             주석한 노승老僧조차도 모르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의상이 창건한 화엄
             십찰華嚴十刹에 대둔사가 들어 있는 사실 또한 당시 해남현이 신라의 땅이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죽미기』의 기록을 부정했다.

               이러한 『대둔사지』 찬자들의 『죽미기』 기록에 대한 비판을 통한 불교사
             이해는 권4 『대동선교고』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대동선교고』는
             삼국불교의 시말始末에서 일차적으로 『삼국사기』를 기초로 찬술되었지만,

             다산의 지적은 적지 않다. 고구려·백제불교 기사가 지나치게 소략함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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